한줄평
17세기 근대 철학자 스피노자의 사상과 현대의 여행심리학을 문학적으로 결합한 독특한 하이브리드 작품.
간략한 독서 경험
이 작품은 본질을 꿰뚫어 보는 시선으로 여행과 다양한 곳의 다양한 인간들, 특히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삶을 탐구하려는 그녀의 진심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존경스럽고 영감을 주는 이 책은 개인적 올해의 책 Top 5에 쉽게 들 만하다. 가끔씩 서정적이고 시적인 문체가 즐거웠고, 흔치 않은 시선과 관심사도 무척 흥미로웠다. 다만, 해부학에 대한 집착은 솔직히 말해 꽤 밥맛이 떨어졌다.
중반으로 갈수록 철학적 뉘앙스가 짙어지며 데카르트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녀는 스피노자를 추앙한다. 물론 데카르트가 한 번 언급되고 스피노자의 이름이 네 번 나온다는 단순한 해설이 아니라, 이 책의 정신은 거의 100% 스피노자에 바탕을 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세기 철학을, 이 낡고도 쾌쾌한 이상을 이렇게 현대적인 글과 구조로 재구성하다니, 그 시도만으로도 대단하다.
스피노자와의 연관성
토카르추크의 작품에서 나오는 "렌즈 연마공"은 스피노자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렌즈를 연마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작품에서 반복되는 “절단된 신체”는 결핍과 고통, 전체성과 분열을 상징적으로 표현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스피노자 철학에 주요 사상을 다루고 있다.
결핍과 고통: 스피노자가 결핍과 고통을 인간 존재의 일부로 탐구한 것처럼, 토카르추크 또한 인간의 내면에서 느껴지는 결핍과 실존적 고통을 표현한다. 방랑자들이 경험하는 고독과 방황, 그리고 여정에서 겪는 다양한 감정은 삶의 불완전함과 상실감을 반영한다.
전체성과 분열: 올가는 개인과 세계가 분리된 것이 아닌 서로 얽혀 있는 관계로,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표현한다. 이는 각 개체가 하나의 실체에서 비롯된다는 스피노자의 전체론적 시각과 유사하다.
신의 개념: 스피노자의 신 개념에서 신과 자연이 동일하다는 관점은 방랑자들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날 수 있다. 올가는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고, 방랑을 통해 만나는 모든 경험이 신성한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데, 이는 스피노자가 이해한 신의 내재성과 일맥상통한다.
육체와 영혼의 관계: 토카르추크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 혹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유동적 관계를 다룬다. 스피노자는 육체와 영혼이 하나의 실체에서 서로 다른 속성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하나의 substance” (하나의 실체)로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통해 인간의 존재를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 했습니다. 작품에서 반복되는 “열차와 비행기”가 상징적으로 표현 되었습니다.
기하학을 통한 이해: 스피노자는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 기하학적 원리와 논리를 사용하여, 실재를 더 명확하게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토카르추크는의 작품은 세상의 구조적 질서와 그 안에 속한 인간의 존재를 독창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방랑자들>은 스피노자의 철학과 상당히 관련이 있으며, 그의 철학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스피노자의 생각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여행과 방랑의 의미
나에게 “여행”은 촌스러운 소비문화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의 여행 붐은 80년대 일이 아닌가? 나는 이런 뒤늦은 여행 문화가 싫었고, “물질주의에 돈을 쓰지 않고 여행이란 경험에 돈을 쓴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인류애가 소진되는 느낌이 들었다. 고도의 소비문화인 여행 상품을 기웃거리는것은 물질주의 혼란스러움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대중적이지 않은 반감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내가 괴팍한 사람인지, 아니면 시간이나 경제적 여유가 부족해 여행하는 사람들을 질투하는 건 아닌지. 올해 가장 좋았던 책, 사카모토 류이치의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에서 조금 안정을 찾았다. 그도 여행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거래처에서 대접을 받고 관광지를 둘러보던 중, 길이 막혀 정제된 차에서 뛰쳐나와 “I hate sightseeing!”이라고 외쳤다는 에피소드를 읽으며 그의 아름다운 영혼에 매료되었다.
여행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모를 <방랑자들>을 들면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여행에 대한 반감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불필요했으며, 오히려 여행을 “인간의 유동성”이라는 개념으로 분해해 조금더 바라보는 시각이 깊어 진 느낌이 든다.
나에게 여행이란 어떤 목적이나 관심을 달성하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가는 것이며, 추가적으로 그 지역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대중의 여행은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유명 관광지를 선택하고 관광 상품을 소비하는 행위다. 여행 유튜버 빠니보틀은 자신에게 여행지 추천 요청이 많다고 하지만, 그게 정말 혼란스럽다고 한다. 본인이 가고 싶은 여행지가 있을 텐데, 왜 타인에게 추천을 받고, 그런 여행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고 말한다.
토카르추크의 여행은 인간 본질의 유동성과 그로 인한 자아의 확장을 통해 주도적으로 삶의 진리 혹은 영적 평안에 다가가고자 하는 실천으로 보인다.
여행과 존재에 대한 연관성
토카르추크의 유동성 개념은 여행이라는 문화의 스펙트럼을 조금 더 넓혀준 듯하지만, 결국 지나친 일반화로 인해 자신의 주장이 약화된 글이라고 느꼈다.
책을 통해 그녀는 두 가지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1.)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동하는 존재이며, 유동성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고 자아를 확장한다.
2.) 여행을 하며 마주하는 외적 및 내적 세계를 탐구하다 보면, 단순해 보이는 것들 속에 세상의 진리가 존재한다.
이동과 유동성의 개념은 참신했으며, 여행심리학이라는 생소한 분야에 대한 지식도 나에게 매우 새로웠다. 그러나 결국 이동과 관련성이 떨어지는 내적 세계에 대한 해부학적이고 영적인 내용이 도입되면서 창의성이 다소 감소했다고 느꼈다.
옮긴이 최성은이 '옮긴이의 말'에서 “방랑자들은 한마디로 여행기이다. 인생이란 결국 하나의 긴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책 을 관통하는 궁극적인 주제는 ‘여행’ 혹은 ‘방랑’을 하는 주체 인 인간에 대한 실존적 고찰이라고 할수 있다.”라고 평한다. 이 평가는 저자의 창의성을 깎아내리는 진부한 해설처럼 느껴지지만, 옮긴이의 요약은 정확하다. 결국 <방랑자들>은 헤르만 헤세가 여행 에세이(방랑 Wanderung, 1920)를 통한 작업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 진부한것이다. 헤세의 <방랑>광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 물리적 여행과 형이상학적 존재,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중심으로 여러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으며, 각기 다른 문학적 접근을 통해 공통적으로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사유를 공통적으로 제공한다.
흥미 있었던 부분
가장 인상 깊었던 챕터는 ‘재의 수요일 축일’이라는 단편 소설 부분이다. 주인공 에릭의 삶을 관통하는 회고록이 캐주얼하면서도 깊이 있게 다가와, 마치 헤세의 작품 '싯다르타'의 삶이 떠오를 만큼 감명 깊었다. 에릭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공개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사실 저자가 진정한 선고를 내린 대상은 독자들이다. 저자는 말한다—참회하라! 삶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영적인 삶을 회복하라! 우리는 삶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나머지, 마치 신체 일부를 포름알데히드에 담가 실험관에 가둔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챕터와 관련된 두 가지 인상 깊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짧은 직선 코스. 너무도 민망하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모욕이다. 구간을 오가며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불성실한 기하학, 여행의 패러디. 바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나고, 단지 브레이크를 밟기 위해 속도를 올린다.”
“혼자서 일어나고 벌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꿈속에서 시작되어 꿈속에서 끝나는 여행도 있습니다. 그리고 불안에서 비롯된 혼란스러운 외침에 응답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신들 앞에 서 있는 사람도 바로 그들 중 하나···“
그녀는 철학자가 아니다. 내 리뷰가 까칠해 보였다면, 아마도 철학적 탐구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대단한 문학가다. 일어서서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이 글을 마무리 하며 몇가지 작품 속 문장을 남긴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라는 특권을 마다하고 우리를 빤히 훑어보다가 몸을 돌려 버리거나, 아니면 느긋하게 미로 탐험에 복귀한다…이러한 현상은 우리에게 보내는 일종의 위협과 조롱의 몸짓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생리적 반사 작용이 기계적인 것이고 무고하다는 우리의 맹목적인 믿음에 위배되는 것이다.”_ 세상 속의 머리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다. 이번에 만난 순례자는 조각조각 부서진 상태였다.”_보는 만큼 안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앞에 여행객 한 무리가 둘러서서 경건한 태 도로 그림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팽팽한 긴장의 순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어디선가 찰칵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지곤 했다. 마치 디지털 언어로 내뱉는 새로운 '아멘'처럼.”_원본과 복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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